문화춘 文和春 Moon Hwa Choon

[b. 1938]

조선화가.
공훈예술가.
호는 벽파.
평양미술대학 교원.
평양철도부미술창작사.
송화미술원 회원 작가.

중국 길림성 연길 태생의 문화춘은 해방 후 귀국하여 길주와 평양에서 인민학교, 중학교를 다녔다. 아버지가 평양음악대학의 초대학장인 문하연으로, 예술가 집안에서 성장한 문화춘은 어릴 때부터 음악과 미술을 자주 접하게 되었고, 그 중에 그림에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1960년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한 그는 모교의 교원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대 그는 조선화 《동지들이여, 이 총을 받아주오》(1961), 《구룡계곡》(1962년), 《첫 등교》(1964년), 《왕우구 인민들의 전선원호》(1965), 《파도》(1966년) 등을 여러 전람회에서 발표하였다. 그중 《구룡계곡》이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이 시기 조선화 화가로서 문화춘의 실력은 평범하였는데, 이는 교원이라는 직업적 특성이 현실에 대한 조형적 파악과 표현적 개성의 성취에 있어 제한성을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창작적 사색을 중단하지 않으면서, 끊임없는 기술 연마로 독자적 경지를 개척할 수 있는 전문 창작 기관으로의 이동이 필수적이었고, 1969년부터 일하게 된 철도부미술창작사는 이러한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창작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1970년대 첫 국가미술전람회에 그는 조선화 《내금강의 아침》(1971년, 90x175cm)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주제적 성격을 띤 풍경화로서 금강산의 자연 풍경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인민 생활의 터로서의 금강산, 낙원의 이미지로서의 금강산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내금강 골 안과 강 위를 지나는 넓은 다리 위로 농장원들이 일터로 나가는 모습을 세부적으로 그려 풍경화의 주제적 의의를 더욱 강조하였다. 이러한 형상은 밝고 선명하며 진한 색채로 더욱 강조 되었다. 특히, 당시 다른 조선화 작품 보다 색도가 높은 것으로 주목을 끌었고, 이후 색을 연하게 쓰기에 현실의 색채미를 풍부하게 반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낡은 관념을 극북하고 현대 조선화 형식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문화춘은 이러한 성과에 이어 조선화 《구시물동》(1975년), 《계곡의 아침》(1975년), 《새 철길을 이어》(1980년, 118x169cm), 《가림천 여울》(1980년) 등을 창작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풍경화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풍경화 창작으로 산과 바위, 나무와 물을 자기 방식으로 파악하고 그리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그것을 정립하여 개성적 화법을 이룩하였다. 특히, 계곡과 물 형상에서 독자적인 화법을 성취했으며, 파도와 물의 흐름을 통하여 풍경화에서 움직임을 강조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호를 벽파라고 지었다. 
1980년대 이후 왕성한 창작적 의욕으로 다수의 풍경화 작품을 발표했다. 이 시기의 수백여점에 이르는 조선화 작품들 중 《내칠보의 쌍폭포》(130x70cm), 《상팔담에서》(94x60cm), 《달밤의 매화》(197x93cm), 《송호의 파도》(220x100cm), 《5호 물동의 봄》(197x94cm), 《보통강반의 저녁》(90x50cm), 《벽동군 동구성의 아침》(136x70cm), 《백설강산도》(1300x110cm), 《파도》(100호), 《가림천의 여울》 등이 우수하며 10여점이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었다. 1989년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풍경화, 화조화 100여점을 가지고 개인미술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는 창작에서 이룩한 공로로 1987년 공훈예술가의 칭호를 받았으며, 송화미술원의 회원이다.  
내용은 리재현 저 『조선력대미술가편람』(1999, 문학예술종합출판사)의 ‘문화춘’ 소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pp. 64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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