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韓相翼 Han Sang Ik

[b. 1917]

유화가. 
1944년 ‘추의작’으로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제1차 국가미술전 ‘단강도’로 2등상 수상.
평양미술대학 교원.
1971~84년까지 하방.
강원도미술창작사 소속 작가.
평양국제문화회관 개인전.
1997년 작고.

평안남도 함주 태생의 한상익은 1936년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 강습과 1년 수료 후,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했다. 스무 살이 넘어 미술공부를 시작한 상황에서 민족적 멸시와 차별까지 인내해야 했던 그는 학교 과정 내 미술수업 이외에 많은 시간을 도서관에 소장된 서유럽 미술복제품원서와 제실 박물관의 동양미술관에 전시된 조선과 중국의 고대 중세 미술 작품들까지 열심히 연구했다. 서유럽 미술복제품원서들 속에서 그의 관심을 끈 것은 19세기 중엽의 프랑스 미술가들인 테오도르 루소, 장 프랑소와 밀레, 카밀 코로 등의 작품들에서 보여 지는 풍부한 색채였다. 보수적인 아카데미아 미술이 가진 색채 형상의 부족점을 극복하고 자연이 가진 다양하고 풍부한 색채로 들어간 진보적 미술가들에 의해 당시 화단에는 생신한 색채의 기운이 약동하고 있었다.
1943년 2월 10일 군사훈련시간에 머리를 자르지 않고 나왔다고 하여 그는 일본육군대좌로부터 모욕을 당하게 되었다. 그때 장발은 미술가들이 흔히 하고 있던 모습이어서 학생들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다.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했고 조선인의 존엄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일본 학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기 신발을 벗어 교관을 쳐서, 땅바닥에 드러눕혔다. 이 일로 그는 추격을 피해 고국 고향땅으로 돌아왔고, 해방될 때까지 그림을 그리는데 전념하였다. 
이 시기 창작한 작품이 유화 《부엌에서》, 《추의작》이며, 이 작품들은 1944년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으며 《추의작》은 특선을 받았다. 《부엌에서》(30호)는 어두운 부엌 천장 앞에 분홍 저고리에 흰 치마를 입고 서 있는 소녀의 모습을 형상한 것이다. 배경에는 전형적인 조선 농촌 집 창문살이 어렴풋이 보인다. 미술가로서 한상익의 이름이 널리 알리게 된 작품은 《추의작》이다. 흔한 농촌집 마루에 걸쳐 앉은 할머니가 포도를 담은 바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을 황금비율을 적용하여, 특히 색채 효과를 통해 장식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당시 전람회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서울에서 해방을 맞이한 한상익은 그 해 11월, 고향 함흥으로 갔다. 그때부터 조선미술가동맹 함경남도 현역미술가로서 창작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문화예술축전준비사업의 일환으로 미술전람회조직요강이 발표되었다. 한상익은 이 전람회 준비에 열정을 다 바쳐, 1947년 8월에 열린 제1차 국가미술전람회에 유화 《단강도》(200호), 《수확 전날》(50호), 《풍년송》(50호)을 출품하였다. 3개월간 성진제강소에서 노동계급의 삶을 체험하면서 창작한 《단강도》는 주제의 적극성과 높은 예술성으로 문학예술상 2등을 수상했으며, 이 작품 창작 공로로 김일성 주석의 표창장을 받았다. 《단강도》는 노동자들이 긴 쇠 집게를 틀어잡고 시뻘겋게 단 강괴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강철을 단련하는 것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고향 함주벌 농민들의 생활에서 일어난 변화를 보여 주는 《수확 전날》, 《풍년송》도 당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수확 전날》은 수확 전 준비를 위해 낫을 벼리고 있는 농민의 심리를 형상화하고자 하였고, 여기서 작가가 발견한 생활의 세세한 모습들도 형상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바가지에 물을 떠놓고 발로 숫돌을 고이고 앉은 늙은 농민의 모습, 낫날이 섰는가를 가늠해 보는 격정이 넘치는 얼굴 표정, 외양간에서 낫을 가는 주인의 모습을 내다보는 망아지 한 마리를 배경에 넣은 점 등이 그 예다. 검은 황소가 풍년의 황금전야를 향해 소리를 내고, 상의를 벗은 농민이 풀단에 기대여 새납(태평소)을 불고 있는 모습을 형상한 《풍년송》도 농민들의 기쁨을 반영한 그림이다. 《수확 전날》은 유화 물감을 충분히 써가며 예리한 단 붓질로 인물을 형상했다면 《풍년송》은 반대로 유화구를 두텁게 발라 주인공의 얼굴과 육체의 입체감과 질감을 나타냈다. 
1948년 제2차 국가미술전람회에 《어로도》(200호)를 내놓았으나 형식에 치우친 작품으로 평가되며 낙선되었다. 제3차 국가미술전람회에는 유화 《주만술 농민의 수도전작의 성과를 찬함》(200호), 《5월의 초상》(50호)을 내놓았다. 
1950년 4월 평양미술대학 교원으로 임명되어 1955년 9월까지 후세대 교육 사업에 힘을 쏟으면서 한편으로는 유화 《임무를 띠고》(12호), 《피로써 맺어진 우의》(120호), 《고지의 이야기》(1954년, 120호), 《금강산》, 《새 땅에 씨를 뿌리고》(1955년, 200호) 등을 창작하였다. 《고지의 이야기》는 가을걷이를 도와주러 나왔던 한 인민군 군인이 소나무 그늘진 풀밭에서 지난 6.25전쟁(북한은 ‘조국해방전쟁’으로 기술)시기 경험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담았다. 손시늉, 몸동작을 해가며 이야기하는 주인공의 형상과 이야기에 심취한 주위 인물들을 마치 살아 움직이는 현실 그대로의 생동한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문학예술상 1등을 받았다. 《새 땅에 씨를 뿌리고》는 국가미술전람회 출품 이후 제1차 사회주의국가 조형예술전람회에도 전시 되었고, 이전 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 중국에서 개최된 순회전에도 출품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상익은 1955년 말부터 1971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 함경남도, 강원도 위원회에서 현역미술가로 창작생활을 하였다. 유화 《만추의 금강산》(1956년, 200호), 《지원군 환송》(1958년, 200호), 《마산 봉기》(1959년, 200호), 《4월의 아들 딸》(1965년, 800호), 《선하게》(1966년, 300호) 등은 이 시기 창작된 주요한 작품들이다. 《만추의 금강산》, 《지원군 환송》 등은 국제미술전람회들에 출품되어, 견실한 골격을 이루는 단단한 소묘력과 맑고 아름다운 색채로 해외에 북한 미술의 발전상을 알린 작품으로서 기록되어 있다.
리재현에 따르면, 한상익의 창작생활에서 주제 내용보다 형식적 측면을 중시하면서 창작에서 주관주의에로 나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 시기이다. 물론 이전의 그림들에서도 인체의 비례를 무시하고 8등신의 인물들을 그리는 현상과 색적인 대조를 강조하는데만 치우치는 편향들이 나타나 화단에서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가는 창작적 개성문제, 조형적 형상과 형식 문제에서 새로운 것을 주장하며, 《마산 봉기》 와 《4.19》 그리고 《4월의 아들 딸》 등 역사적인 내용을 반영한 작품들에서 또다시 물의를 일으켰고, 잡지 《조선미술》은 이러한 작품창작과 관련하여 내용과 형식, 구성과 구도, 소묘와 색채 등 여러 측면에 걸쳐 논의를 거듭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화가가 성과에 도취되어 해방 후 새로운 것을 들고 나오면서 형식에 치우쳤던 그러한 경향성을 1960년대에 들어와 다시 발로시켰다고 본 당국은 중견미술가로서 화단에 차지하고 있던 그의 위치가 다른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 방법에 의거한 창작생활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그에게 조취를 취했다. 결국 1971년에 들어서면서 한상익은 통천군 고저 수산사업소, 고산군 광명공예품공장 등지에서 일하면서 1984년까지 약 14년간 현장에서 창작 생활을 하게 된다. 이 기간 그는 거의 미술전람회에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대중의 인정을 받는 훌륭한 미술작품을 창작해 다시 화단에 등장하겠다는 각오로 사색과 탐구를 진지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그를 이해하고 도와준 이가 53세에 결혼한(1970년) 아내였다.
아내의 적극적 도움으로 금강산에 들어가 1년에도 몇 달씩 현지 창작을 하였고, 학도시절부터 추구하던 색채미 탐구와 조형적 형상에서 성공적 성취를 얻었다. 10여 년간 창작한 200여점에 달하는 금강산과 원산의 이름 있는 곳들을 그린 주옥같은 작품들은 한상익의 창작 활동에 있어 의미 있는 작품들이다. 김일성은 한상익의 작품을 보고 조선화와 비슷한 유화라면서 우리 민족의 기호에 맞는 우리식의 유화로서 높게 평가했다. 그가 조선화 기법으로 그렸다며 높이 평가한 유화 《국화》(1978년, 53x68cm)와 《총석정의 아침》(1982년), 《만물상》(1979년), 《구룡각》(1979년), 《봄날의 온정리》(1980년), 《왕찔레꽃》(1983년), 《선하계의 가을》(1983년), 《금강산 연주담》(1985년), 《삼일포》(1986년), 《옥류동의 가을》(1987년), 《총석》(1989년), 《비봉포》(1990년) 등 금강산에 바쳐진 수많은 작품들은 우리 식의 독특한 유화를 창조하려는 한상익의 탐구와 노력의 결실이었다. 
한상익은 이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강원도 미술창작사에서 창작생활을 지속하였으며 1992년 국제문화회관에서 매우 성공적인 개인미술전람회를 가졌다.  
한상익은 삼천리 금수강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형상해보고자 한평생 힘을 다한 미술가였다. 현실에서 우리의 색을 발견하며 우리식 유화 기법을 연마해나가 밝고 선명하고 섬세한 민족 고유의 유화를 창작하려는 것이 그가 지향한 목표였다. 북한에서 한상익의 작품들은 조선화의 밝고 선명한 묘사기법을 구현한 우리식의 유화, 반유화로서 평가된다. 금강산의 명소들을 그린 수많은 작품들을 관통하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색채미와 섬세한 필치는 한민족 고유의 미이며 기법으로, 이러한 미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 위해 그는 초인간적 노력을 경주하였다. 한상익은 오직 현실에만 머리를 수그릴 뿐, 자기의 미적 지향, 미의 세계를 연마해 나가는데 집중했다.
   
내용은 리재현 저 『조선력대미술가편람』(1999, 문학예술종합출판사)의 ‘한상익’ 소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pp. 36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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