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모 鄭昌模 Jung Chang Mo

[b. 1931]

조선화가.
인민예술가. 
호는 효원(曉園).
조선미술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 
평양미술대학 교원.
만수대창작사에서 작품 활동. 
국가작품심의위원회 조선화 심의위원.
2010년 작고.

전라북도 전주 태생의 정창모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대한 재능을 보였으나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미술에 대한 열망을 실현시킬 수 없었다. 
6.25전쟁(북한은 ‘조국해방전쟁’으로 기술) 시기 의용군에 입대한 그는 전투 속보를 발간하고 연극 《정각 5시 30분》 등의 무대 장치를 제작하고, 부대에서 조직한 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점차 미술에 대한 관심을 높이게 되었다. 
1956년에 제대한 그는 개성시 설계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조선미술가동맹 개성시위원회가 운영하는 야간미술연구소에서 소묘를 배웠고 일요일에는 야외에서 수채화를 그렸다. 당시 개성시 동맹 위원장이던 임군홍은 남한에 고향을 두고 혈혈단신으로 들어온 그를 깊은 관심으로 각별히 지도하였다. 그는 미술 재료를 재공해주고, 기초가 약한 점을 감안하여 소묘 공부에 힘쓰도록 지원하였다. 
정창모는 1957년 26살의 나이에 평양미술대학에 입학하였다. 나이 많은 학생이었던 그는 전문부 1학년 과정을 거치지 않고 2학년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담임이었던 김장한은 그의 굳어진 손목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쓰며 조선화를 그리기 위한 필력을 기르기 위해 권투를 권하기도 하였다. 이에 권투를 배운 정창모는 한 때 대학선수로 경기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조선화학부에 진학한 때부터는 정종여, 리률선의 지도를 받았는데, 이 시기는 조선화에서 채색화를 중시할 때여서, 교육에서도 채색화 교육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1학년 때(학부) 아동 도록에 수록될 조선화 《아동단원들앞에서 연설하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2학년 때 《총가목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는데 당시 출판물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졸업 작품으로 조선화 《배머리에 오신 어버이수령님》(1963년, 155x220cm)을 창작했다. 그는 이 작품의 창작을 위해 남포조선소에서 1개월여의 기간 동안 현실 체험을 하며 현지습작과정을 거쳤다. 본 작에 착수할 때. 정종여는 소금기가 있는 안개 속의 바다와 눅눅한 어선의 환경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종이가 필요하다며, 자신의 대벽지를 그에게 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창모는 졸업 작품이자 사회에 내놓는 첫 작품이었던 《배머리에 오신 어버이 수령님》의 창작은 청계 정종여의 각별한 관심과 세심한 지도 덕에 성공적일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이 작품은 김일성이 이른 새벽 바닷가의 한 수산사업소를 방문하여, 고기 배에 올라 어로공(북한어 - 고기잡이를 전문으로 하는 노동자)들의 손을 잡아주며 그들을 고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정창모는 조선화 분야에서 독자적 창작 역량을 가진 유망한 미술가로 인정받게 된다. 
정창모는 실기와 함께 미술이론연구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으며, 동서양 미술사로부터 미학이론, 창작 실천 상 문제, 기법원리 등 여러 분야를 포괄하였다. 미술이론강좌의 김재홍 선생의 세심한 지도 속에서 그는 소논문 《겸재의 생애와 활동》, 《오원 장승업의 생애와 창작》, 《19세기 러시아 이동파 화가들의 창작》 등을 집필 발표하였다. 
1963년 졸업 후 평양교원대학 교원으로, 그 후 조선미술가동맹 현역미술가로 배치되며 사회생활 및 창작생활을 시작하였다. 
1966년 그는 제9차 국가미술전람회에 조선화 《북만의 봄》(108x148cm)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초기에는 주인공의 성격이 명백하지 못하여 주제적 측면에서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작품의 정서적 힘과 훌륭한 묘사력으로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한 평론가가 이 작품의 창작적 성과에 대해 논리적으로 평론한 후 혁명 전통 주제 대표작의 하나로서 정창모의 40년여 창작생활에서 가장 우수한 성과작으로 공인되었다. 사색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적 형상으로 인해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작품의 화폭 중심에는 고삐를 쥔 항일유격대 여대원이 눈석이(‘눈석임(쌓인 눈이 속으로 녹아 스러짐)’의 북한어)물을 먹고 있는 말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좀 떨어져 있는 숲속에서 휴식하는 대원들이 묘사되어 있다. 리재현에 의하면, 얼핏 보기에는 휴식하는 항일유격대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점에서 주제 내용이 비적극적인 듯 보이나 형상을 살펴보면, 그 뒤에 담긴 이야기들 - 항일유격대원들이 넘어야 했던 험난한 사선, 겨울의 엄혹함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조국 광복을 이루기 위한 투쟁의 길 - 을 연상하게 하여 정서적 여운을 주는 작품이며, 조국광복과 투쟁의 새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심리적 체험으로 느끼는 여대원의 형상과 일련의 세부묘사로 구체화시키면서, 아직 가야 할 투쟁의 길이 멀고 험난하다는 것을 쌓여있는 눈과 갈대들을 통해 강조하여 화면의 구성을 심오하게 형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화 《설맞이》(최계근과 합작, 1968년, 186x309cm), 《4.19의 용사들》(최계근과 합작, 1968년, 172x320cm), 《검덕골에 찾아오신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1968년), 《북대정자회의를 마치고 조국을 바라보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리병호와 합작, 1969년, 168x245cm), 《금강산 계곡》(1970년), 《흰 구름 피어나는 창성 땅》(1971년, 124x78cm), 《만경대의 봄》(1972년), 《남산의 푸른 소나무》(황영준과 합작, 1972년), 《동해의 아침》(1973년), 《동석동의 가을》(1973년), 《청산리 사람들》(1973년), 《영농 준비를 보살피시는 혁명의 어머니 김정숙 동지》(1974년, 80호), 《금부리의 가을》(1975년), 《비봉폭포의 봄》, 《눈 내린 모란봉》(1975년) 등은 현역미술가로 활동하던 시기 창작한 주요작품들이다. 조선화 《4.19의 용사들》은 1960년 남한에서 있었던 4.19혁명을 다룬 작품으로 국가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하였다. 
정창모는 이 시기 김일성 주석과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을 우상화한 다수의 주요주제 작품을 창작하여 조선혁명박물관, 회령사적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 사적관의 개관 및 진열 개편 사업을 보장했다. 
그는 이 시기 풍경화 창작에서 남다른 성과를 이룩하였는데, 이 성취는 일관 리석호의 실기지도와 관련된다. 그가 리석호의 실기지도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65년부터였다. 그는 정창모를 제자로서 기르고자 함께 미술박물관에 자주 방문하여 이조회화 특히 오원의 몰골그림에 대해 분석해주고, 형상 방법에 대해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창작실에 돌아와서는 오원의 우수한 몰골그림을 묘사해보도록 하였고, 조선화 몰골 창작에서 해결해야 할 붓 다루는 기술, 감성적으로 정화된 색채 형상 방법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지도하였다. 리석호는 자신이 평생을 두고 숙달한 기술과 기교를 숨김없이 내놓고 넘겨주려는 자세로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정창모는 리석호와 그림 창작을 위해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기도 했다. 원로 미술가의 이러한 실천적 교육과정을 거치며, 하루 2~3시간의 규칙적 운필 연습으로 기량을 숙달한 정창모의 필법은 스승을 닮아갔다. 
1975년에 이르러 조선화 분야에서 정창모의 위치는 확고해지고 주요 주제와 풍경화에 대한 창작 과제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 시기 김정일은 ‘만수대창작사’를 나라의 종합적인 미술창작기지로 재편할 구상으로 조선미술가동맹에서 현역미술가로 있던 정영만, 정창모, 최계근, 홍성철, 리원인 등 핵심적 창작가들을 만수대창작사로 집결시켰다. 정창모는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 풍경화실 실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1976년 조선화 《비봉폭포의 가을》, 《청류벽의 봄》, 《해솟는 바다》, 《만물상의 가을》, 《비로봉의 해돋이》의 초안을 창작하였다. 이 작품들은 본작이 매우 크기 때문에 집체적으로 완성되었다. 1977년에는 《백두산의 봄》, 《천선대의 가을》을 발표하였으며, 이해에 공훈예술가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 시기부터 풍경화가로서 그의 창작 활동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그는 수예원화 《호수가의 말》(1979년), 조선화 《철쭉꽃》(1980년), 《집선봉의 가을》(1981년), 《온정천의 봄》(1982년), 《비선폭포》(1983년), 《금부리의 가을》(1984년), 《금강산 채하봉의 여름》(1985년), 《분계선의 옛 집터》(1985년), 《묘향산의 봄》(합작, 1986년, 길이 36m), 《꽃밭》(1986년, 초안 김춘전, 93m, 합작성원으로 참가하여 풍경 주로 담당), 《동해의 해돋이》(1986년), 《장벽을 넘는 철새들》(1988년) 그리고 주요주제로서 《소왕청 근거지에 이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1977년)와 《묘향산 비선폭포》(1988년), 《임진강 눈석이》(1989년) 등을 창작하였다. 이 외에도 수 천점의 풍경, 화조 몰골 그림을 그렸으며 1989년 창작공로로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1970년대 중엽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 정창모는 창작 생활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장을 장식하였다. 이 15년여 간 그는 무려 2,000여점에 달하는 풍경화, 화조화를 창작하였고, 국내외적으로 널리 작품이 소개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기는 그의 창작에서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작품에서 구현된 그의 형상적 특징은 색조가 부드럽고 여운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드럽고 여운 있는 정서적 깊이는 독특한 작화 방법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그는 몰골기법으로 자연을 그리면서 지나친 사의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형사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그의 몰골은 실경산수화로 느껴진다.
풍경에서 그는 몰골법에 의거하면서도 단필법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단계를 설정하고 점차적인 방법으로 자연을 그려내어 필치가 거칠거나 생경하지 않으며 부드럽고 깊이 있는 색조로 대상의 형태미와 색채미를 훌륭히 살려냈다. 실재 자연경치를 보면서 실재와 같게 재현하는 실경산수의 논리성에 충실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거기에만 얽매이지 않는 회화적 환상을 실현하여 사의와 형사 두 측면을 유기적으로 조화시켜나갔다. 형태 해석과 표현에서도 고도의 숙련을 전제로 하여 몰골화이지만 형태의 윤곽, 음영, 운동감 등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금강산, 묘향산 등 하늘을 찌를 듯 한 기암괴석과 무성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변화무쌍한 바위산과 계곡을 표현하는데서 그의 기법은 한층 효과적이다. 그의 그림이 깊이가 있고 정서가 느껴지는 것은 형태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려는 노력과 대상의 본질을 그리면서 자기의 미적 이상과 감정을 풍만하게 표현하려는 사의적인 몰골방법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다. 
그의 그림에서 또한 중시된 것은 준법이다. 역필과 측필을 혼용하여 바위와 산을 그려나간 정창모의 준법은 부드러운 듯 하면서도 송곳처럼 날카롭고 포근한 듯 하면서도 까칠하여 여름의 산과 바위, 겨울의 계곡 등 계절과 모양이 다른 산과 바위들의 모양새를 다양하게 표현한다. 또 진한 먹과 연한 먹을 대비시키는 시각적 인상, 물기를 주어 번지게 하여 촉촉한 느낌을 주는 그의 수묵화들은 일정한 격을 형성하며 그림의 풍격을 높여준다. 부드럽게 스치듯 붓을 밀거나 끌며 거꾸로 움직여 변화무쌍한 자태를 드러내는 선묘, 결구를 찍으며 붓 자국을 낸 힘찬 터치는 그의 몰골그림에서 힘과 기백, 약동성을 더해준다. 
1980년대 중엽 이후 화조화 영역으로 주제를 확대하여 진달래, 목란꽃, 들국화, 포도, 작약, 유자 등과 고려자기, 이조자기 등을 배합하여 창작한 정물형식 몰골화는 그의 특기이다.
정창모는 리석호, 정종여, 김용준 이후 시기 몰골화 분야에서 가장 우수한 성과를 보여주었고 그의 풍경화들은 현대 조선화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는 고향땅, 부모형제들에 대한 생각을 잊지 않고 조선화 《분계선의 옛집터》, 《장벽을 넘는 철새들》, 《임진강의 눈석이》 등을 창작하기도 하였으며 작품에 간혹 《전라도인》, 《지리산인》 이라고 썼는데 이것은 호가 아니라 반드시 실현해야 할 조국통일의 염원과 이를 위한 자신의 의무를 표현한 것이다. 
정창모는 일련의 이론 집필 활동도 하였는데, 1960년대 이후 《조선미술》, 《조선예술》 등 잡지에 수십 편의 소논문들을 발표했고 단행본 《화조화기법》, 《풍경화기법》, 《필치론》 (김순영과 공동 집필) 등 조선화 기법과 관련한 도서들을 집필, 출판하였다. 해박한 지식과 오랜 창작 경험에 기초하여 쓴 기법 도서들은 전통적인 조선화 화법을 토대로 조선화를 더욱 발전시켜나가는데 참고서가 되고 있다. 
그는 만수대창작사에서 조선화 화가 후배들을 많이 길러내었으며, 1980년 이후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국가작품심의위원회 조선화 부분 심의위원으로 활동했다.
2002년 기준으로 정창모의 작품 중 1백여 점이 북한의 국보로서 평가받아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2005년과 2006년 중국 베이징 국제미술전에서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하며 국제무대에서도 세계적 수준을 인정받았다. 
2000년 8월 14일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1차 상봉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2016년 1월에는 광복 70년, 분단 70주년을 기념하며 전주 한옥마을 교동아트센터에서 정창모의 유고작품이 전시되었다. 

1999년까지의 내용은 리재현 저 『조선력대미술가편람』(1999, 문학예술종합출판사)의 ‘정창모’ 소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pp.529-534) 
2000년대의 내용은 네이버 지식백과의 시사상식사전과 두산백과 ‘정창모’의 내용을 참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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