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선

[b. 1919]

도예가.
인민예술가.
‘김일성상’ 계관인.
만수대창작사 도자기창작단 도자기창작가.
1983년 일본에서 현대고려청자기 2인전 개최(우치선, 임사준).
1985년, 1989년 일본에서 현대고려청자명작전 출품.

평안남도 강남군 태생의 우치선은 1931년 상암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해방될 때까지 송림도자기공장, 개성고려자기공장에서 견습공, 기능공으로 도자기를 만들었다. 1945년 9월 이후 송림도자기공장 기술지도원, 공장장으로 일하다가, 이후 남포도자기공장 공장장으로 있으면서 일본인들이 버리고 떠난 공장을 복구하고 생활 도자기를 제작하였다. 이 시기부터 고려자기 생산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그는 전후시기에 고려청자기에 대한 연구와 제작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1955년부터는 선교도자기공장 준비실장으로 있으면서 고려청자기를 전문으로 연구하고 되살리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는 1960년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도자기 창작에 집중할 수 있었다. 첫 작품이 《청자국화무늬단지》(1964년)이다. 그 후 《해바라기문보시기》(1965년), 《국화문화병》(1966년), 《흐름유과실반》(1966년), 《각사탕단지》(1966년), 《양념단지》(1966년), 《감부각무늬꽃병》(1971년), 《목란무늬상감접시》(1975년), 《국화인화상감꽃병》(1975년), 《국화무늬꽃병》(1977년), 《목란무늬상감장식꽃병》(1977년), 《해바라기상감꽃병》(1978년), 《평양풍경무늬꽃병》(1980년) 등을 국가전람회에서 발표하였다. 이 시기까지만 하여도 그는 도자기 분야에서 창작가로서 보다는 도자기기술자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창작가로서 그의 존재는 만수대창작사에서 활동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김정일은 만수대창작사에서 청자기 제작 실현을 위해 도자기기술자들을 집결시키고 이를 모체로 유능한 기술자들을 길러내고자 하였고, 이에 따라 우치선은 1981년 9월 만수대창작사 도자기창작단에서 창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도자기 《만병초무늬청자꽃병》(1982년), 《동백꽃무늬청자꽃병》(1982년), 《국화무늬청자꽃병》(1982년), 《함박꽃무늬청자꽃병》(1984년), 《진달래상감청자꽃병》(1985년), 《목란꽃상감청자꽃병》(1991년), 《만병초무늬청자꽃병》(1991년), 《꽃무늬청자꽃병》(1994년), 《운학무늬반상기》(1997년), 《구름학무늬호로주전자》(1988년), 《인장무늬꽃병》(1987년), 《국화무늬꽃병》(1985년) 등 국내, 국외에서 진행된 미술전람회들에 수백여점의 작품을 창작 전시하였다. 그 중 《만병초무늬청자꽃병》, 《구름학무늬호로주전자》, 《인장무늬꽃병》은 각각 1등, 2등, 3등에 당선되었다.
그의 작품은 1980년대 여러 차례의 전시를 통해 일본에 소개되었다. 1980년 9월 《현대고려청자기전시회》, 1983년 《현대고려청자기 2인전시회》(임사준, 우치선), 1985년 10월, 1989년 4월 《현대고려청자명작전》 등이다. 
리재현에 따르면, 북한에서 고려청자기가 현대에 다시 빛을 보게 되고 수준 높은 경지에서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은 김성택과 그의 제자들인 임사준, 우치선 등 공예가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치선은 고려청자기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려청자기의 소재와 무늬형상수법, 소성과 관련한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일은 고려청자기의 신비한 제작과정을 되살리는 고된 일이었다. 그는 청자기에서 수제성형에 의한 1품 공예의 요구를 원만히 구현하며, 밀점밀화장식수법의 우수한 표현방법을 현대적 미감에 맞게 발전시킨 섬세한 무늬 구성으로 정교성을 보장한 도예가로서 평가받는다. 그는 소품부터 높이 1미터가 넘는 큰 청자기 꽃병에 이르기까지 수준 높은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그는 1982년 공훈예술가, 1984년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김일성상》 수상자가 되었다. 

내용은 리재현 저 『조선력대미술가편람』(1999, 문학예술종합출판사)의 ‘우치선’ 소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pp. 382-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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