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철 鄭寬徹 Jung Kwan Chul

[b. 1916]

유화가. 조선화가.
인민예술가. 
김일성상계관인.
1949년부터 35년간 북조선미술가동맹 위원장.
1983년 사망.

평양 태생의 정관철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어 동네에서 꼬마 미술가로 알려졌고 보통학교 때에는 동네 범위를 벗어나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종로고등보통학교 3학년이었던 1932년, 첫 작품 수채화 《보통문 풍경》(20호)을 전람회에 출품하였는데 입선작이 되었다. 학교 졸업 후 그림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간 그는 한 시험소의 요업부 잡부로 일하면서 미술관에 전시된 조선 시대 유명 화가 단원, 혜원, 겸재 등의 그림을 자주 찾아보았으며, 당시 유입된 서양화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유화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후, 그린 《용악산 풍경》(1936년, 40호)이 전람회에서 입선작이 되었고, 이 작품의 판매로 얻은 자금으로 1937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비를 감당하지 못했던 그는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신문과 우유 배달, 광고도안, 사진색 수정 등 여러 일들을 맡아 하며 학비를 마련, 다시 학교에 들어가 마침내 5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1942년 졸업하였다. 이 시기 우리 민족 미술을 발전시킬 목적으로 조규봉, 김하건, 한상익 등과 함께 《황토회》를 조직하고, 창작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943년 일제의 징병을 피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평양공립상업학교에서 미술 교편을 잡았다. 해방 전 창작한 작품들로는 《자화상》(1937년), 《거리 풍경》(1939년), 《향추》(1942년, 50호) 등이 있다.
해방 직후에는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 선전부에서 주로 선전화, 격문들을 그렸고, 1945년 10월에는 김일성의 개선을 환영하는 평양시 군중대회를 위한 김일성의 첫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정관철은 평양시미술동맹 상무위원장이 된 후, 1946년 5월, 여러 작가, 미술가들과 함께 김일성을 직접 만나 항일혁명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는 그 날 준비한 화첩에 김일성의 모습을 여러 장 그렸고, 특히 보천보 전투에 대한 이야기에 크게 인상을 받았다. ‘보천보 전투’를 작품으로 남길 것을 결심했던 그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산하 미술동맹의 선전부장 등의 업무로 이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다 행정실무에서 벗어났던 1948년 봄, 보천보 전투를 그리려는 결심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보천보 현지답사를 다녀왔다. 경찰관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가림천과 곤장덕 등지를 답사하면서 시가지 풍경과 많은 인물들을 습작하였고, 이에 기초하여 작품창작을 하였다. 그리고 그 해 열린 미술전람회에 유화 《보천보의 횃불》을 출품하였다. 연이어 1949년에는 유화 《보천보 풍경》 3부작을 전국문학예술축전 미술전람회에 출품하였고, 2등에 당선되었다. 
정관철은 1949년 2월에 열린 북조선미술가동맹대회에서 동맹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근 35년간 조선미술가동맹 위원장의 자리에 있었다.
6.25전쟁(북한은 ‘조국해방전쟁’으로 기술)시기 종군하여 전쟁의 전 기간 동안 다수의 선전화들과 유화를 창작하였다. 1951년 겨울 곡산 빨치산, 구월산 빨치산의 투쟁을 현지에서 취재하였고, 전쟁의 현장을 체험하면서, 선전화 《피는 피로써 갚자》, 《인민군 장병들이여, 원수를 갚아다오》, 유화 《월가의 고용병들》, 소묘 《빨치산 소녀》 등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전후 1950~1960년대에 그는 미술전람회 작품 창작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동맹 각 분과위원회와 도위원회의 창작지도기능을 강화하여 북한 미술 발전에서 이정표로 기록된 8.15해방 10돌 경축 국가미술전람회, 공화국창건 10돌 경축 국가미술전람회, 제9차 국가미술전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그는 동맹위원장의 중책을 맡고 있었음에도, 유화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작성하시는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조국 산야에 동이 튼다》, 《강철을 만드는 사람들》, 《1211고지 전투》 등의 주제화들과 130여점의 혁명전적지 풍경을 창작하였다.
정관철은 북한에서 문학예술분야의 혁명적 전환기로 인식되는 1970년대 당의 미술건설방침을 창작에서 실현하기 위해 앞장선 인물로 평가된다. 조선화 《검덕 지하 막장에 비낀 자애로운 햇빛》(합작, 1977년), 조선화 《조선아 너를 빛내리》는 등은 그러한 의미에서 제작된 그의 대표작이다. 
정관철은 당과 지도자에 대한 충실성에 대하여 북한 내부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김일성 주석의 모습을 화폭에 옮긴 첫 미술가이기도 했고, 유화 《보천보의 횃불》을 비롯한 주체미술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선전화들을 다수 제작했기 때문이다. 
유화 《보천보의 횃불》(1948년 창작, 1955년 개작, 333x248cm), 《조국 광복을 위하여》(1962년, 200x300cm),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작성하시는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1966년, 191x122cm), 《오직 수령님만을 믿고 따르렵니다》(1982년, 200호), 조선화 《조선아 너를 빛내리》 등은 지도자 김일성, 김정일의 업적과 풍모를 예술적 형상으로 창조한 대표작으로 북한 내에서 평가받고 있다. 
《보천보의 횃불》은 김일성 주석이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이끌고 보천보에서 일제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는 내용을 다룬 작품이며, 보천보에서 군중 앞에 연설하는 김일성의 모습을 담고 있다. 리재현에 따르면 보천보 전투의 역사적 의의를 서사시적 화폭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주제사상적 내용의 깊이에서 뿐만 아니라 형상의 조형적 완벽성에서도 북한 미술의 성과작이다. 특히, 그는 조형적 완벽성은 주제내용을 천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면의 포착, 내용의 통일된 서사시적 화면 구성, 구도적 중심의 정확한 설정과 인물들의 성격적 교감의 실현, 개성적 성격 표현, 깊이 있는 세부 묘사, 주제 내용과 전형화 된 환경 묘사 등에서 집중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고 언급했다. 수많은 군중들이 중심을 향해 밀려드는 듯한 파도식 원형구도, 밤을 표현하는 짙은 군청색과 이를 밝히는 빛의 표현으로 붉은 계열의 색채구성, 폭과 깊이가 느껴지는 공간묘사, 정확한 필치로 대상의 입체감과 운동감을 그려낸 솜씨 등이 지나간 역사의 생동성과 진실감을 실현시켜주고 있다는 것이다.  
유화 《오직 수령님만을 믿고 따르렵니다》는 김일성 주석 탄생 70돌 경축 국가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으로 김일성 주석에 대한 인민의 충성심을 예술적으로 창조한 우수작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김일성 주석이 1957년 첫 대위원선거일에 강서군 태성리의 유권자를 만났던 상황을 다룬 것이다. 
선거장을 방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일성 주석이 방문한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는데, 아들을 군대에 내보낸 한 유가족 어머니가 김일성 주석의 안색에서 심려하는 마음을 읽고, 인민의 변함없는 충정을 스스럼없이 전했다는 내용이다. 리재현은 노인을 비롯한 주위 인물들의 표현이 지도자 김일성 주석을 믿고 따르는 인민의 숭고한 사상 감정을 진실하게 형상화하고 있다고 평가했으며,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해 나아가는 인민들에게 사상 정서적 힘과 고무적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았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의 혁명 역사를 반영하는데 헌신한 그의 창작적 지향은 김정일의 위대성을 칭송하는 미술작품 창작으로 그대로 이어졌다고 평가되는데, 김정일이 검덕의 지하막장을 현지지도 하는 장면을 다룬 조선화 《조선아 너를 빛내리》가 그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그가 병환 중에 있을 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붙잡고 있었던 작품이라 전해진다. 그가 초안과 습작으로 작품을 시작하여 본작을 추진하였지만, 그 완성은 결국 아들 정유성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관철은 일반 주제화 창작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미술의 여러 종류의 형상 방법에 능했다. 대표작으로 유화 《모내기》, 《월가의 고용병들》, 《강철을 만드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행복의 시위》(1958년, 112x143cm), 《1211고지전투》(류현숙, 양재혁과 합작, 1965년) 등이 있다. 《월가의 고용병들》(1952년, 119x197cm)은 인민군들의 호송 하에 평양 거리를 걸어가는 미군 포로병들의 모습을 다룬 작품이다. 《강철을 만드는 사람들》(1957년, 198x116cm)은 사회주의 국가 순회전람회에 출품되었으며, 노동 계급의 노동 장면을 다루었다.
소묘력이 남달리 뛰어났던 그는 초상 형식의 미술 작품도 많이 그렸는데, 특히 김일성 주석의 어린 시절부터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이르는 여러 단계를 다룬 초상화를 많이 창작하였다. 또한 《혁명투사 박달동지》(1955년, 81x66cm), 《공화국영웅 김재호 동무》(1955년, 81x66cm), 《선동원 리신자》(1961년), 《을지문덕 장군》(1956년) 등 많은 초상화 형식의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또한, 정관철은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고무시키는 전투적이며 호소력이 강한 선전화들을 다수 창작하였다. 선전화 《보통강 개수공사》(1946년), 《민주 선거》(1949년), 《미제를 격멸소탕함에 총궐기하자》, 《피는 피로써 갚자》(1951년, 55x78cm), 《인민군 장병들이여, 원수를 갚아다오》(1951년), 《조국의 독립과 세계 평화를 위하여, 후손 만대의 행복을 위하여》(1952년, 55x78cm),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1952녀, 55x78cm) 등이 대표작이다. 이러한 6.25전쟁(북한은 ‘조국해방전쟁’으로 기술) 시기 창조한 그의 선전화들은 선전화 발전에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북한 미술의 성과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관철은 풍경화 분야에서도 다양한 재능을 나타냈다. 유화 《보천보 풍경》(1949년), 《만경대》(1960년), 《얼두강의 고원풍경》(1959년), 《홍원풍경》(1964년), 《비파 거리가 보이는 풍경》(1979년), 《수정봉》(1983년)을 비롯하여 혁명전적지와 사회주의 건설장 풍경, 아름다운 조국의 자연을 그린 수 백 여점의 풍경화들을 창작했다. 특히, 혁명전적지 풍경의 경우, 6개월간에 걸친 혁명전적지 답사에 기초하여 창작하였다.
리재현에 따르면, 창작가로서 정관철은 현실에 충실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른 새벽 자연의 아름다움을 생동한 필치로 그린 유화 《조국 산야에 동이 튼다》 등 그의 모든 작품은 현실에 충실한 그의 창작태도를 입증한다. 특히, 주제화에서 매 인물의 개성을 현실적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표현하고, 성격을 전형화한 것은 인물 습작을 통해 축적한 그의 노력의 결실이다. 그는 또한 자기 작품에 대한 사회적 합평과 동지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인정하면 대담하게 고쳐나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작품이 가진 부족점을 보완해나가는 것이 미술가의 양심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예로, 해방 후 북한미술사의 최대 걸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그의 대표작 《보천보의 횃불》은 처음 창작된 후 수차의 개작을 거쳤던 작품이다.  
미술가동맹위원장으로서 정관철은 조선화를 기본으로 북한 미술을 구축해나가려는 당의 주체적 미술 방침을 따랐다. 리재현에 따르면, 1970년대 북한 미술에서는 주체가 확립되고, 혁명적 전환이 일어나, 전반적 미술에서 유화가 우세를 차지하고 조선화가 천시되던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고, 조선화를 기본으로 북한 미술의 주체를 세우려는 당의 방침이 확고해진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유화를 그려온 정관철은 조선화를 남보다 먼저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많은 유화가, 출판화가들이 조선화 화법을 체득하게 함으로써 조선화 화가 대열을 확대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도서 《은혜로운 품속에서》 1권에서 《화폭마다에 깃든 어버이 사랑》, 도서 《따사로운 햇빛 아래》에서 《우리 나라 미술에서 기본은 조선화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도서 《따사로운 했빛 아래》 8권에서 《빛나는 예지로 완성시켜주신 불멸의 화폭들》 등이 바로 그의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정관철은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하였고, 미술 발전과 창작에 대한 공로로 ‘김일성상’과 ‘인민상’을 받았으며, 미술부분에서의 첫 공훈예술가, 인민예술가가 되었다.
김정일은 정관철이 사망한지 3년째 되던 해인 1986년 12월에 조선미술박물관에서 정관철, 정종여 2인 미술전람회를 개최하도록 했다. 거의 2개월에 걸쳐 진행된 전람회에는 해방 전부터 사망 전까지 창작한 주제화, 풍경화, 선전화, 출판화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정관철의 작품은 조선미술박물관, 조선혁명박물관, 조선역사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 사적관들에 전시되어있다.
그는 1949년과 1952년, 1957년, 1973년에 조선미술가동맹대표단, 조선문학예술총동맹대표단 단장으로 (이전의) 소련, 중국, 마자르, (이전의) 체코슬로바키아, 쿠바 등 여러 나라들을 방문하여 북한 미술을 널리 소개 선전하고 여러 나라 미술가 사이의 교류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위의 내용은 리재현 저 『조선력대미술가편람』(1999, 문학예술종합출판사)의 ‘정관철’ 소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pp.34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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