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학훈 白鶴勳 Back Hak Hoon

[b. 1938]

조선화가. 유화가. 출판화가.
인민예술가.
호는 웅해.
평양미술대학 교원.

함경북도 선봉군 태생의 백학훈은 어릴 때부터 미술에 남다른 재주를 가져, 중학 시절부터 미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그림 그리기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가 살던 삼수라는 산골에서는 전문미술가의 지도도 받을 수 없었고 전쟁 시기라 회화작품 하나 감상할 수도 없었다. 다만 출판물들에 실리는 그림이나 전쟁 시기 발행된 선전화들이 그의 ‘선생’이 되어 주었고, 그는 이러한 그림들을 따라 그리곤 하였다. 
그는 평양미술대학 출판화학부에 입학하여, 1959년 졸업하고 21살에 평양미술대학 교단에 서게 되었다. 졸업 작품으로 장편소설 《역사》의 삽화를 발표하였는데, 국가미술전람회에서 2등에 당선되었다. 이 장편 소설의 삽화창작과 전람회 입상을 통하여 신인미술가인 그가 출판미술계에서 부상하게 되었다. 출판미술 분야의 여러 형식 가운데 그는 예술 삽화를 자신의 분야로 삼고, 본격적인 삽화가로서의 창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근 40년간(‘조선력대미술가편람’이 출간된 1999년 기준) 북한의 삽화 예술을 대표하는 6,000여점에 달하는 많은 작품을 그렸는데 책 삽화와 더불어 사람들 속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도서 《세 아동단원에 대한 이야기》(1960년), 《서광》(1960년), 《청천강》(평양신문연재삽화 450여건, 1963~1964년), 《대하는 흐른다》(1965년), 《수난의 청춘》(1972년), 《모략의 소굴》(1977년), 《남산 지하실》(1980년), 《반항》(1981~1982년), 《한라산》(1983~1984), 그리고 잡지 《천리마》, 《아동문학》, 《시대》, 《조국》 등에 투고한 그의 예술 삽화는 단색 또는 백묘 방법으로 그려졌는데 소설의 장면들과 밀착된 인간성격과 행동묘사, 정황묘사로 하여 매우 흥미로우며, 작가가 작품에서 표현할 수 없었던 직관적 표상을 생동감 있게 펼쳐내 소설의 내용을 풍부하게 했다. 특히 그의 삽화는 당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고찰, 확인된 의상과 생활도구의 묘사로 하여 진실성을 담보하고 있으며. 인물의 행동과 성격표현이 빈틈없는 소묘와 필력으로 선명하게 그려져 매우 자연스럽고 명확하다. 
백학훈의 예술 삽화에서 절정을 이루는 명작은 총서 《불멸의 역사》 중 장편소설 《백두산 기슭》(박진수와 합작, 1984년), 《압록강》(1985년), 《봄 우뢰》(최호철과 합작, 1989년) 등의 미술 형상이다. 이 그림책들은 담고 있는 주제 내용의 폭과 깊이에 있어서, 그리고 삽화 형상의 예술적 심도에 있어서 북한 삽화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각각의 그림 자체가 일반 회화 형식 수준의 질적 형상을 확보하여, 김일성의 영상과 함께 화면의 구성과 색채표현, 기술적 처리가 단독 작품처럼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된다. 예술 삽화는 단순히 소설의 내용을 기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언어적 수단으로 보여줄 수 없던 것을 직관적 언어로 형상을 재창조하는데 있다. 이러한 삽화예술창조의 요구에 맞게 그는 소설을 통하여 보고 느낄 수 없었던 인간관계의 행동적 변화와 심리, 구체적 정황과 환경을 풍부하고 다면적인 직관적 형상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삽화의 예술적 풍격을 더 높였다.
백학훈은 삽화를 전공하였지만 선전화, 수채화, 판화 등 출판미술전반에 정통한 미술가이다. 그는 선전화 분야에도 특기가 있어 선전화 《분열주의자들의 <두개 조선> 조작 책동을 짓부시고 조국을 통일하자!》(1978년), 《민족대단결의 기치 밑에 조국을 통일하자!》(1981년), 《아, 수령님을 위하여! 당 중앙을 위하여!》(1982년), 《광주의 복수를!》(1983년), 《니카라과는 삶과 투쟁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1985년), 《미제침략자의 몰골》(1985년)과 템페라화 《일제의 조선인 약탈과 패망》은 국가미술전람회에서 각각 2등에 당선되었고, 그의 선전화들이 다수 국제선전화전람회에 출품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밖에 동판화 《청봉숙영지》(1959년), 《매국노의 운명》(1963년), 《늪》(1965년), 석판화 《보통강역 건설장》, 《용광로의 달밤》, 수채화 《일터로 가는 길》(1990년), 《리계순 동지의 최후연설》(1962년), 《금강산 여울》(1964년) 등도 창작하였다.
백학훈은 출판화 뿐만 아니라 조선화, 유화 등 회화 작품창작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조선화 《수류탄 공장을 현지 지도하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1974년), 《부암수동 마을을 떠나시는 공산주의혁명투사 김정숙 동지》(합작, 1974년), 《해금강》(1974년), 《11년제 의무교육의 첫 개학날에 찾아오신 아버지원수님》(1975년), 《두만강 연안의 지하공작원들에게 임무를 주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1975년), 《작곡을 지도해주시는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1976년), 《장자산에 오르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1976년), 《농촌기계화의 새 역사를 마련하여 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1978년) 등 혁명주제의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이 작품들 모두가 조선혁명박물관, 조선미술박물관, 왕재산과 군자리 혁명사적관 등 많은 박물관, 사적관들에 보존 전시 되어있다. 이밖에도 그는 조선화로 민족 풍속과 관련한 주제의 병풍들, 《춘향전》 등 고전 소설을 주제로 한 병풍들을 창조하였다. 그림들은 다채롭고 화려한 색과 치밀한 선들로 주제를 밝고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는 유화작품도 창작하였는데, 《복수의 전야》(1966년), 《또 맞았다》(1993년)를 비롯한 다수의 인물 주제화, 초상화 형식의 유화들은 굳건한 소묘력이 특징적이다.
백학훈의 창작에서 특징은 출판화가로서의 기발한 착상과 묘사가 특기로 나타나 창작과 생활소재의 발견에서 독특하고 함축된 구성으로 출판화적 특성을 잘 살린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삽화 창작가로서 가장 중요한 실무적 요구인 인간 성격을 조형적으로 다양하게 파악한 생동적 화면들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는 그림을 기교적으로가 아니라 진실하고 착실하게 그린다. 언제나 정확성으로 빈틈없는 구성을 바탕으로 하며, 인물들의 자세와 운동을 해부학적으로 확인해나가 작은 착오도 없도록 진실성과 과학성을 부여하는 데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 묘사 대상에 대한 정확한 소묘와 함께 생활환경, 생활 자료들의 과학성을 중시한다. 따라서 그의 그림들은 필치가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진실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그 어느 미술가보다 현실에 대한 조형적 파악이 깊고 직관적 표상과 형상 능력이 높은 것으로 북한 미술계에서 평가받고 있다. 이것은 수재형 미술가로서 비상한 기억력과 함께 꾸준한 기초 훈련 과정을 거쳐 도달한 풍부한 지식과 높은 기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창작한 삽화집 《삽화작품집》(1984년), 《혁명소설 삽화 작품 초안》(1994년)과 현지 습작을 묶은 《혁명사적지, 혁명전적지》(1991년)가 출판되었다. 이 삽화집들과 습작 묶음은 북한에서 미술을 배우는 학생들과 신인미술가들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그는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 출판화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분과전람회, 선전화전람회를 조직하고 창작지도사업을 하였으며 판화 강습, 선전화 강습, 수인판화 강습 등을 주기적으로 조직하여 맹원들의 예술 기량을 높여 주기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1990년 이후부터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국가작품심의의원회 분과 및 종합심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미술작품창작에서 이룩한 공로로 하여 1977년에 공훈예술가, 1986년에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내용은 리재현 저 『조선력대미술가편람』(1999, 문학예술종합출판사)의 ‘백학훈’ 소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pp. 637-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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