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경 金周經 Kim Joo Kyung

[b. 1902]

유화가. 
호는 파국(波國).
송도중학교, 경기중학교, 개성중학교 미술교사.
선전(鮮展)을 대체하기 위한 ‘녹향회’ 설립.
오지호와 2인 화집 발간.
서울에서 남조선미술가동맹 결성(위원장).
월북. 평양미술대학 전신 미술전문학교 교장.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인공기) 및 국장 도안 참여.
1981년 사망.

충청북도 진천 태생의 김주경은 경성제일고보 시절인 1923년 고려미술원에서 이제창의 지도로 오지호, 김용준 등과 함께 그림수업을 받았으며, 1923년과 1924년 고려미술원 전람회에 참여하였다. 1925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도화사범과에 입학했다. 그가 사범과를 선택한 것은 사범과는 다른 과보다 2년이나 수업연한이 짧았기 때문에, 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집안의 생계유지에 도움을 주고자 함이었다. 재학 중 일본 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에 가입하였다. 1929년 연구과까지 마치고 귀국하여 송도중학, 경기중학, 개성중학에서 미술교원으로 있으면서 미술창작을 하였으나 학교 당국의 민족적 차별에 불만을 품고 경기도 양주에서 3년간 농사를 지었다.
1926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연속으로 3회 특선을 받았으나 선전이 일제의 어용전람회라 생각한 뒤로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전람회를 조직할 결심으로 1928년 서울에서 박광진(朴廣鎭), 심영섭(沈英燮), 장석표(張錫豹)와 함께 양화운동 그룹인 《녹향회(綠鄕會)》를 조직, 1929년 천도교 기념관에서 녹향회 창립전을 개최하였고, 이듬해 오지호(吳之湖)가 가담한 2회전에는 민중회화를 출품, 이때부터 녹향회를 민중적, 계몽적, 민족적 성격으로 전개시켜 나아갔다. 1932년 3회전을 계획하였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좌절되었다. 1938년 오지호와 김주경 두 사람의 작품 각 10점, 그리고 오지호의 「순수회화론」과 김주경의 「미와 예술」이라는 논문이 실린 『오지호·김주경 이인화집』을 발간하였다. 자비로 발간한 이 화집은 한국 최초의 원색 호화판 화집이다.
이 시기 창작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유화 《정물》(1927년), 《야산》(1933년, 50호), 《숲》(1934년, 30호), 《초가을의 숲》(1935년, 8호), 《소녀》(1935년, 6호), 《늦은 봄》(1936년, 8호), 《봄》(1936년, 30호), 《부녀자들의 들놀이》(1936년, 50호), 《가을의 자화상》(1936년 50호), 《가을별》(1936년), 《동배나무》(1939년)이며 그 이후 시기의 것으로 《산속의 아침》(1942년), 《산골의 첫 가을》(1944년) 등이 있다. 작품의 주된 주제는 봄, 가을 절기에 따라 변하는 우리나라의 자연풍경이며 인물 주제인 경우 풍속 생활이 기본이다. 
리재현은 김주경의 풍경화, 풍속화들에는 김소월, 이상화 등 비판적 사실주의 작가들의 시와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빼앗긴 조국과 고향산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짙게 깔려있으며, 대다수 풍경화들이 이러한 사상 감정으로 일관되어 있다고 보고 이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또한, 주제의 소극성은 형식의 구현에도 표현되어, 조국 산천에 대한 그리움은 연분홍, 연녹색 등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하는 유연한 색들에 의하여 더욱 야릇한 향수를 자아내고, 당시 유행한 인상주의 미술의 영향을 받았던 관계로 색채구현에서 주관주의적 현상을 나타내었다고 본다. 현실에 대한 관조적 태도와 표면적인 조형적 효과에 치중하는 경향성은 1930년대 후반기 이후 작품들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나는데, 유화 《봄》, 《부녀자들의 들놀이》 등 일련의 그림들에서는 민족적, 계급적 모순에 대한 사회 문제에서 더욱 멀리 벗어났고 대상의 형태와 세부를 무시하면서 사물을 색채로만 고찰하여 광선의 효과를 노린 후기 인상주의 경향에 깊이 빠져들어 갔다는 평이다. 따라서 이 그림들에서는 대상의 입체감, 현실감 보다 자극적인 색들을 화면에 마구 발라 놓은  느낌이 강하게 오기 때문에, 보여주려는 내용이 조형적 형상을 통해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서술하였다. 
서울에서 8.15 해방을 맞이한 김주경은 광복 직후 1945년 조직된 조선미술건설본부 서양화부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그 후 조선미술가협회 주요인물로 활동하였으나, 협회에서 탈퇴, 1946년 조선미술가동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1946년 10월 월북하여, 북조선미술가동맹의 현역창작가로 있다가 1947년 9월 평양미술대학의 전신인 미술전문학교창설과 함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로부터 12년간 미술 부문의 교육 사업을 책임지게 된다. 그러나 미술가로서의 창작 활동 역시 지속하여, 1947년 열린 문학예술축전 미술전람회(제1차 국가미술전람회)에 유화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의 전적》(60호)을 출품하여, 1등상을 받았다. 이 밖에도 유화 《신록》(1947년, 40호), 《조선인민군 열병식》(1948년, 40호), 《용광로》(1949년) 등을 창작하였다. 이 시기 그는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인공기) 및 국장 도안 창작에도 참여하였다. ‘6.25 전쟁’(북한은 ‘조국해방전쟁’으로 기술)시기에는 수채화 《적기와 싸우는 고사포 용사들》(1951년, 20호), 전후복구건설시기에는 유화 《온포 풍경》(1955년, 20호), 《천을 풍경》(1956년, 30호)을 그렸다. 1958년에 평양미술대학 학장 직위를 인계한 후 조선미술가동맹 현역미술가로 있으면서 창작에 몰두하고자 하였으나 오랫동안 교단에 있던 관계로 먼저 현실을 체험하고자, 강원도 평강국영농장에 나가 농민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였다. 이 시기 이후 창작한 대표적 작품들은 유화 《묘향산》(1958년), 《묘향산 계곡》(1961년), 《삼지연의 봄》(1962년, 80x60cm), 《청산리의 봄》(1963년), 《묘향산 여름》, 《청년 공원》(1965년), 《봉화리 전경》(1968년) 등이다. 
리재현은 김주경이 해방 이후 미술 창작에 있어 커다란 질적 변화를 동반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변화는 해방 전 창작에서의 형식주의적 잔재를 극복하기 위한 자체 투쟁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작품의 주제를 설정하는데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김주경은 김일성 주석의 혁명전적지 풍경을 형상하거나 인민군대를 주제로 한 미술작품을 창작하였는데, 북한 미술계에서는 그가 풍경화에서 혁명적인 주제 분야를 적극 개척한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를 가진다고 본다.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과 관련해 미술가들에게 국가의 국장과 국기를 도안해야할 과업이 제시되었다. 당시 평양미술전문학교 교장이었던 김주경은 이 국기와 국장 도안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김일성은 도안 전 과정에 무려 4차례에 걸친 강령적 교시를 내렸다. 그는 국장 및 국기 도안과 관련하여 회상실기 《우리 나라 국장과 국기에 깃든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김주경의 창작활동은 북한 체제 하에서 변화가 있게 되는데, 북한에서는 이를 당의 혁명적 방침 관철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 창작생활의 질적 변화로 본다. 새로운 현실이 요구하는 주제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사실주의적 형상방법, 인민의 민족적 감정과 정서에 맞는 인민적 미술형식에 기초한 건전한 유화 창작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그의 해방 후 창작한 작품들, 특히 1958년 이후 창작한 많은 풍경화들을 정서 깊은 부드러운 색조, 대상의 특징을 추구한 섬세한 세부, 통속적 구성으로 진실하고 생동하며 친근감을 자아내는 작품으로 평가한다. 《묘향산》(1958년, 144x95cm)은 묘향산의 아름다운 가을 경치를 형상한 작품이며, 《묘향산의 여름》(1965년), 《묘향산의 가을》(1966년)도 묘향산을 그린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수작으로 꼽힌다. 묘향산을 그린 풍경화에서 그는 언제나 중경에 역점을 두고, 부드럽고 따뜻한 색조로 화면을 통일시킨 조형화의 방법을 취했다.
유화 《청년공원》과 《봉화리 전경》 등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창작 마지막 시기의 풍경화들은 구도의 변화가 적고 색채 형상이 단순해졌다.  
김주경은 50여 년 간의 미술 분야 활동 경력 중 해방 전후를 통하여 25년간 미술 교원, 대학의 학장으로 미술가 후세대를 키우는데 헌신했다. 해방 전에는 중학교 미술 교원으로 조선 학생들 속에서 찾아낸 재능 있는 미술계 후배를 찾아 길러내는 일을 감당했고, 해방 이후 1948년부터 북한의 미술 교육 기반을 닦는 일을 맡았다.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학교의 물질적 토대는 물론, 이론과 실기 교육의 토대를 구축하여 1949년 9월 평양미술대학으로 미술학교를 개편하였으며, 북한식 미술교육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김주경은 교육 사업에서 이룩한 이와 같은 공로로 1952년에 예술학 부교수의 학직을 받았다. 
김주경은 1949년 북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위원으로, 1954년 이후에는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위원으로 사회단체사업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56년에는 북한 교육시찰단의 성원으로 두 달여간 중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내용은 리재현 저 『조선력대미술가편람』(1999, 문학예술종합출판사)의 ‘김주경’ 소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pp. 239-242) 일부 내용은 네이버 지식백과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주경’의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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