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의 일주일 _고려 · 고구려 역사유적지 탐방과 평양의 미술기관 방문

김영숙(다물통일문화재단 이사장 · 송화미술관 관장)


고려는 천년강국 고구려를 계승하여 918년부터 1392년까지 근 500년간 존속한 우리민족의 첫 통일국가였다. 11세기~12세기경에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한 고려 국호는 지금까지도 조선을 가리키는 고유한 명칭으로 불리 우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고려, 고구려의 역사 증거물들인 동명왕릉, 단군릉, 보물 같은 고분벽화, 만월대, 고구려 성균관 등이 북쪽에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1000여년의 도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개성에는 수많은 역사유적지들이 있다. 그 중 12개는 2013년 6월 유네스코 제3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고려의 왕궁 터였던 만월대와 천문기상관측 시설이었던 개성첨성대, 수도성이였던 개성성과 남대문, 교육 기관이었던 고려성균관과 숭양서원, 선죽교와 표충비, 왕릉들인 왕건 왕릉과 경호왕(공민왕)릉, 7릉떼와 명릉떼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5월18일 오전 11시30분 평양 도착, 오후 3시 대성산 혁명열사릉(한국의 국립묘지에 상당함)에 모셔진 외할아버지를 비롯한 5명의 가족들 반신상 앞에 헌화, 조선 독립 운동과 항일 운동에서 순직한 가족들의 묘지를 참배하는 것으로 첫 평양 일정을 시작하였다.

1 . 고구려 시조 동명왕릉을 찾아 (2019년 5월 19일)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동명왕릉. 300년 전쯤에 산불이 크게 났다. 그 벌로 해송(海松)을 심으라는 명령이 떨어져 제주도에서 3.000 그루를 가져다 심었는데 현재는 1.600 그루만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도굴로 무덤들이 거의 도굴되고, 개봉되어 시조무덤이라기보다는 가짜 무덤에 가까울 정도로 볼품이 없었던 무덤들을 1974년 김일성의 지시로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의 본격적인 발굴과 자료수집과정을 거쳐 현재의 새로운 면모를 띄게 되었다고 한다. 그 작업을 통해 동명왕릉임이 확인 되었고 마침내 1993년 5월에 개건 준공식을 가지며 고구려 유물 1호의 복구를 완성하였다. 동명왕은 기원전 298년 북 부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활쏘기 등 무술에 능하여 일찍이 남다른 재주와 실력을 보여 주었다. 그의 이름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고씨 성은 고구려를 세우면서 붙인 것이다. 주몽은 기원전 277년 그의 나이 22세 때 졸본에서 고구려를 건국했고 그 뒤 주변 소국들을 다스리다가 40세 젊은 나이에(기원전 259년) 죽었다. 동명왕릉은 수도를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지안)에서 평양으로 옮길 때 같이 옮겨왔다고 한다. 북한학계는 줄곧 기원전 277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고 주장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들은 동명왕을 숭배하는 국가적 행사를 꾸준히 해왔다. 그 동안 일본은 왕릉에 벽화가 없기에 인정 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으나 1974년 무덤 칸의 돌 벽 위 붉은 자색바탕의 연꽃무늬 고분 벽화가 발굴되면서 일본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횡설수설이 되어버렸다. 동명왕릉 답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충성송 답사이다. 충성송은 정말로 일부러 그렇게 가꾸려 해도 어려울 것인데, 그 많은 소나무 무리 중 유독 그만이 온 몸을 깊이 숙여서 절을 하고 있다. 충신이 주군(主君)을 머리 숙여 받드는 모습을 하고 있는 충성송이 너무 인상 깊었다. 그 늙은 소나무가 지극정성으로 받들고 있는 주인공이 바로 동명왕의 무덤이었다.

2. 바보 온달의 무덤과 정릉사를 찾아 (2019년 5월19일)
동명왕릉을 옆으로 끼고 돌아보면 여러 개의 작은 무덤들이 보인다. 대신 마리(马离)묘가 있다. 무덤들은 지하가 아닌 지상에 두었다. 다시 소나무를 끼고 돌아보니 무덤 두 개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왼쪽은 대신 오이(鸟伊), 오른쪽은 장군 부분노(扶芬奴)의 묘비 등. 이런 무덤들이 15개가 더 있었다. 공신의 무덤 속에는 바보 온달 장군과 평원왕 공주의 묘도 있었다. 무덤 속에는 연화무늬 천인이 날고 있는 벽화도 또렷이 남아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들을 가진 무덤이 바로 온달과 평강공주의 합장묘라고 한다. 동명왕릉의 원찰이라 하기 에는 제법 규모가 큰 정릉사를 볼 수 있었다. 건축 규모도 남북 동서로 기다란 장방형으로 일찍이 폐찰이 되었다. 발굴을 통해 알게 된 정보에 따르면 정릉사는 1탑 3금당이라는 고구려의 고유한 가람형식을 지니고 있었다. 건축 중심에는 8각탑이 세워져 있었다. 정릉사는 사원건축과 궁전건축 양식이 잘 결합된 독특한 평면구조라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정릉사는 보통사찰과 다르게 후원이 있었다. 발굴한 뒤 1993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8각7층탑은 보광전, 용화전, 극락전의 3금당을 두고 회랑과 중문을 둔 웅장한 면모였다. 고구려의 벽화는 무덤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문을 봉하여 볼 수 없었다. 해설사는 조선미술박물관에 가면 고분벽화 모사작품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다음 날 가기로 하였다.

3. 왕건 왕릉을 찾아 (개성시에서의 1박2일/ 2019년 5월 20일 ~ 21일)
개성성은 발어참성이 896년, 외성이 1009-1029년, 내성이 1391년-1393년에 건립되었고 고려의 수도성이였다. 4개의 부분성으로 되어 있다. 발어참성은 고려가 설립되기 전인 896년에 당시 태봉국의 장수였던 왕건에 의해 축성되었다. 왕건은 919년 개성을 고려의 수도로 정하면서 발어참성을 2개로 나누어 궁성과 황성으로 건설하였다. 궁성은 왕릉을 둘러싼 성이였다. 외성은 고려의 명장 강감찬의 제의로 1009-1029년에 쌓은 성이다. 내성은 1391년에 쌓기 시작하여 1393년에 완성 되었다.

A)개성시 해선리에 있는 왕건왕릉 
943년에 고려의 건국자인 왕건(877년-943년)의 릉이다. 왕건은 42살에 고려를 창건하고 25년간 나라를 통치하다가 943년에 죽은 후 여기에 묻혔다. 릉은 만월대에서 서쪽으로 약 3km 떨어져있는데 송악산의 지맥인 만수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왕건왕릉 뒤 능선을 넘어서면 골짜기건너편에 만수산에서 시작된 긴 능선이 동서방향으로 뻗어져있는데 7개의 능들이 산릉선위에서 나란히 위치해 있다. 이것을 가리켜 능떼 라고 한다. (13세기말에서 ~14세기) 해선리에서 또 볼 수 있는 명릉떼는 고려29대 현효왕(충목왕 345년-1348년)의 무덤인 명릉과 그 주변에 있는 피장자가 밝혀지지 않은 2개의 무덤으로 되어 있었다. 1992년에 왕건왕릉을 크게 하고 석물도 다시 만들어 세우는 개건공사가 진행되어 1994년 완공, 지금의 모습으로 되었다.


왕건왕릉(필자 촬영)

B)개성시 해선리에 있는 경호왕 (공민왕) 릉  
경호왕릉은 고려 31대 경호왕과 그 왕비의 합장릉이다. 나란히 있는 쌍릉 가운데서 서쪽의 것이 경호왕의 현릉이고 동쪽의 것은 왕비의 정릉이다.경호왕릉은 왕건왕릉에서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봉명산의 무선봉 중턱에 있다. 경호왕은 1365년(1365_1372년) 왕비가 죽자 자기가 직접 주관하여 묘 자리를 고르고 왕비의 릉을 만들었다. 쌍릉 형식의 릉은 경호왕릉에서 처음 나타났으며 그 이후 조선봉건왕조시기 왕릉들의 한 형식으로 이어졌다.

C)개성시 송악동에 위치한 고려왕궁터 -만월대 
개성시 송악동 송악산 남쪽기슭에 위치, 919년에 최초 건립되었고 11세기 초(1132-1138년)에 재건 확장되었고 12세기말 ~ 13세기 초에 재건되었다. 고려왕궁의 총 면적은 약 39만 평방미터이다. 만월대는 919년부터 1361년까지 고려 국가의 왕궁이 있던 터였다. 만월대에서 북쪽 해설원이 황성옛터 노래를 1절부터 3절까지 가사 한번 틀리지 않고 부르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그는 또 이 노래의 최초 레코드 취입은 이애리수 선생이 했으나 한동안 금지곡으로 되어 외면당했다가 다시 남쪽의 국민가수 남인수 선생이 불러서 남북국민의 애환이 담긴 애창곡이 되었다고 해설 중간 중간에 울먹이면서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 트롯트의 대표작으로 1928년 지어진 <황성옛터> 노래가 만월대에서 비롯되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북쪽의 해설원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들이 아는 사실을 남쪽에서 온 우리가 모르고 있었다니 부끄러운 일이었다.여기에 지금이라도 황성옛터 노래 가사비를 세우는 것은 남북을 아울러 큰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D)개성시 선죽동에 위치한 선죽교와 표충비 
선죽교는 고려 초기에 건설되어 이용 되였던 오랜 역사와 사연을 담은 역사의 다리이다. 고려 말기에 정몽주가 고려를 위하여 순직한 장소였다는 것으로 유명해진 역사 유적지이다. 선죽교의 본명은 선지교였다. 전설에 의하면 정몽주가 죽은 후 다리 위에 절개를 상징하는 참대가 돋아났는데 그때부터 다리 이름을 선죽교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리 옆에는 두 개의 비가 세워 졌는데 북쪽비는 1740년 조선봉건왕조 21대왕 영조 (1725-1776년)가 세운 비이고 남쪽비는 1872년 조선봉건왕조 26대왕 고종(1864-1907년)이 세웠다고 한다. 

선죽교와 표충비(필자 촬영)

E)개성시 선죽동에 위치한 숭양서원 
숭양서원은 고려말기 재상이었던 정몽주(1337-1392년)가 살던 집이였다. 1573년부터 정몽주를 제사하는 사당 겸 유교교육 서원으로 이용되었다. 숭양서원은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으로 약 500m가량 떨어진 남동쪽 산기슭에 지금도 엣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우리민족교육의 귀한 문화재이다.

숭양서원(필자 촬영)

F)개성시 방직동에 위치한 고려 성균관 
고려성균관은 992년에 건립된 고려시기의 국학으로서 관료인재양성을 위한 국가적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고려 11대 문종왕(1047-1083)때 대명궁이라는 별궁이 있었다. 별궁은 얼마 후에 외국 사신들의 숙소로도 이용되었다가 1089년부터 국자감 건물로 이용되었다. 국자감은 1308년에 고려성균관으로 개칭 되었다.

G) 개성시 송악동 만월대 북쪽에 위치한 고려 개성첨성대
개성첨성대는 고려시기 천문기상관측을 진행해 왔던 역사적인 건물 유적지로서 우리민족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기상관측 유적 중에 하나로 고려 초 10세기에 건립되었다.  

H) 개성 성균관으로 옮겨진 불일사 사찰의 유일한 유물, 월인석보 옥책의 흔적을 찾아 
불일사는 오래전에 이미 화재로 타버려 그 종적이 없어졌으나 불일사에 있던 5층 석불탑은 나중에 성균관으로 옮겨 잘 보존되어 있어 다행히 성균관에서 그 탑을 볼 수 있었다. 옮겨 올 당시 탑 밑층의 유물들은 전부 일제에 도난당했고 맨 위층에 남아 있던 월인석보 불경 책(종이에 쓰여 진)과 일부 유물은 꺼내서 현재 개성고려역사박물관(고려성균관)에 보존되어 있었다. 이것은 서울 홍산문화 중국도자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개성 불일사에서 만들어진 월인석보 옥책의 구본일 가능성에 대한 상당한 근거를 제시한 것으로 그 의미가 크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6월4일 국회에서 열리는 <불교유물의 감정과 문제점> 심포지엄에서 내가 개성고려역사박물관(고려성균관)에서 불일사 석불탑 안에서 찾아낸 불경(종이 책) 구본을 직접 보고 온 내용에 대한 소상한 진술보고를 채택하기로 결정하여 귀한 유물에 대한 친견과정을 보고 드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월인석보 옥책에 대해서는 북한담당 해설원이 들은 바가 없다고 하였다.

4. 조선미술박물관, 조선 송화미술원을 찾아 (2019년 5월 22일)
조선 미술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고분벽화였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가 있음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또한 우리민족사에서 고분벽화가 탄생했다는 것도 고맙게 생각할 일이다. 정말로 우리민족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고분벽화가 없었다면 우리 미술의 역사는 허전하고 깊이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고분벽화가 채색이라는 점은 고구려시기 우리 민족의 우수한 색채 의식을 증명하는 물증도 된다. 고구려벽화는 감상용 미술작품으로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반영해주는 거울로서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런 고분이 그것도 90기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긍지이다. 1500년 전의 화려하고도 박진감이 넘치는 그림을 간직하고 있는 민족이 이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 고분벽화에 대한 예찬은 참으로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다. 어느 외국인 학자가 한 말이 기억난다.“벽화는 현대미술의 족보이다. 벽화를 보유하고 있는 민족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민족보다 훨씬 위대하고 강하다.”왕 무덤 속에 이런 귀한 벽화들이 평양미술대학 모사과 미술가들에 의해 그대로 재현되어 조선미술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인데 세계 어떤 나라 미술대학에도 모사학과는 없다. 그것 역시도 조선 평양미대에서만 유일하게 가르친다. 그 덕분에 고분벽화가 오늘처럼 그대로 베껴져서 만민이 관람할 수 있지 아니한가?송화미술원은 거의 만수대창작사와 같은 시기에 건립되었고 김상직을 원장으로 한 조선의 최고 원로 미술인들의 단체이다. 북한미술에서 김상직 ,송시엽, 황영준, 김권용을 빼고는 북한미술을 말할 수 없듯이 북한미술에서 송화미술원의 존재는 만수대창작에 뒤치지 않는 북한 최고원로미술인 단체라는 데서 그 신뢰성과 작품성, 예술성을 인정받아왔다.그렇던 송화미술원이 원로미술가들이 잇따른 사망으로 존재가치를 잃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게 너무 아쉬워 송화미술원 앞에서 한참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간신히 감정을 추스리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김춘전, 김상직 선생님과 다른 잘 모르는 화가 작품들이 여러 점 걸려 있었는데 작품 판매가격은 위안화로 적혀 있었고 송화미술원 원로화가들의 작품가격 또한 수십 배로 뛰어 버렸다. 맘 같아서는 작고하신 몇 분의 작품을 다 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는 터라 쓸쓸한 맘으로 송화미술원을 나왔다.

5. 세계 최대 규모 미술 창작기지 만수대창작사를 찾다 (2019년 5월 23일) 
13년 만에 찾은 만수대창작사이다. 왠지 허전하고 쓸쓸한 기분이 들면서 전처럼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전에 그렇게 반겨주던 최고 미술가들이 십 여 년 사이에 모두 사망하셨기 때문에 지금은 안면이 있는 화가들이 몇 명 안 되었다. 문화춘, 이문길, 황인제, 김춘전, 황병호 선생님은 살아계신 줄로 알고 갔는데 뜻밖에 그 곳에서 그들도 다 고인이 되었다는 비통한 소식을 접하였다. 북쪽이 자랑하는 뛰어난 예술가들이 모두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는 충격에 슬픔을 금할 길이 없었다. 지금 서울 송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97%가 유고작이 되었다. 그 분들을 다시 뵐 수 없다는 것은 큰 슬픔이고 우리민족 미술사의 큰 손실이다. 

만수대창작사(필자 촬영)

6. 단군릉을 찾아 (2019년 5월 24일)
단군릉은 평양시내에서 약 35km 떨어진 근교에 자리 잡고 있다. 강동군 강동읍 대박산 동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김정일 별장이 그 쪽 어딘가에 있어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잘 닦여 있었으나 그날은 그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없다는 명령이 떨어져서, 할 수 없이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보니 40분 거리에 있는 유적지를 약 1시간 반을 달려 간신히 도착했다.멀리서도 눈이 부시게 빛을 반사하며 들어오는 하얀색의 거대한 조형물이 적당한 높이의 산등성 위에 피라미드식으로 쌓아 올려 있었다. 20세기 후반, 김일성의 지시로 건축된 거대한 축조물이었다.단군릉은 지난 1993년 초 간동의 단군 유해를 발굴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개건사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래의 단군 무덤에서 약 10 리 떨어져 있는 이곳에 새롭게 자리 잡아 1년간의 공사 끝에 1994년 10월 3일 준공하였다. 10월 3일은 단군이 탄생일, 즉 개천절이기도 하다.단군 조선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3000년 초로 보고 있다. 단군릉의 석릉은 중국 지안의 장군총(장수왕 무덤) 형식을 참고하여 규모 있게 축조했다. 9층으로 높이는 22m, 한 변의 길이가 50m로 1994년에 준공 된다는 의미에서 1994개의 돌을 사용하였다. 후관에 출입구를 설치하여 석릉 내부의 중앙에 안치한 목관까지 출입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석릉의 네 귀퉁이에는 범 조각을 새겨 놓았다. 만수대창작사 조각 미술가들이 제작한 석조 범조각 한 마리의 무게는 90톤에 이른다고 한다. 160톤짜리 통 돌을 사용하여 조각한 것이다. 또 단군 시대의 상징으로 청동비파형단검이 세워 졌다. 석인상은 단군의 네 아들로 왼쪽 첫 번째가 큰 아들인 부루이다. 진입로의 계단은 모두 289개이며 좌우의 석인상 8명은 단군의 신하들이었다.실로 대단한 역사(役事)이다. 단군릉에서 또 눈여겨본 것은 대형 화강석을 대충대충 깎아서 세워놓은 석주들, 추상미술을 인정하지 않는 조선에서 뜻밖의 대단한 추상미술 같은 설치미술을 보았다. 거기에 사용된 석재는 주로 남포시의 용강석을 사용했다고 해설원이 설명했다.아쉬운 것은 조선이 보존하고 있는 수많은 우리 문화재들 중 단군릉은 아직 유네스코에 등록되지 않았다. 남북 고고학자들이 함께 노력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다.

단군릉(필자 촬영)

7. 조선 국립미술박물관 관장과의 짧은 만남 (2019년 5월 25일)
22일 미술박물관 방문 시 관장 면담이 승인 나지 않아 뵐 수 없었다. 25일 드디어 방문 승인이 떨어져 잠깐 만나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조선미술박물관은 김일성 광장 앞에 위치해 있는데 놀랍게도 그 노른자위 땅 양쪽을 국립 미술관과 박물관이 차지하고 있었다. 미술관, 박물관이 최고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이기에, 평양은 그것만으로도 희망이 보이는 도시이다.면담으로 주어진 시간이 40분이라 긴 얘기는 뒤로 미루고 남북화가 방문 교류전에 대해 잠깐 대화를 나누었다. 현실적으로 남북 관계의 현 상황에서는 북한 화가의 남한 방문은 당장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조선미술박물관 소장품(국보) 중 월북 작가 유고작품 전시를 제안했더니 의외로 관심을 가지셨다. 기획안을 작성하여 보내달라고 했다.이것은 남쪽미술사의 공백이었던 부분이라 큰 화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제안했다. 남북미술사에서 월북, 월남 작가전은 전례가 없었던 미술사적 사변이 될 만한 사건으로, 이런 전시회가 남북 양쪽 국립미술관이 주관하고, 다물통일문화재단 주최로 추진이 된다면 민족 미술사에서 역사적 사변을 만들어 내는 대목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분단의 미술사, 잊혀진 미술가들의 70생을 돌아 볼 수 있는 큰 의미가 되기에 북한미술유산 학술정보구축에도 큰 기여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북측 화가들의 서울 방문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판단하여 양쪽 미술관 국보급 소장품 중 월북, 월남 화가 소장품만 가지고 서울과 평양에서 전시회를 한다는 것은 참 의미 있는 일이다. 전시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만전을 기하기로 했다.2000년대, 평양 시내에는 첨단 과학기술 빌딩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과학기술발전을 중시하고 독려하는 국가적 방침에서 건설 되었다. 여명거리에 지어진 고급 아파트들은 정부가 지어서 국가에 공헌한 과학자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한 것으로, 일명 과학자 거리로 부르고 있다. 평양의 변화된 모습 중 하나였다.  

북한 평양 여명거리 모습(필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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