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준 黃荣俊 Hwang Young Joon

[b. 1919]

조선화가.  
공훈예술가.
호는 화봉(华峰).
이당 김은호 사사师事.
평양미술대학 교원. 
조선미술가동맹 평안남도위원장. 
송화미술원 회원작가.
2002년 작고.

충청남도 태생의 황영준은 1931년 서울에 상경, 이당 김은호의 화숙인 후속회 조선미술원에서 미술을 배웠다. 당시 화숙에는 리석호, 김기창, 장우성 등이 수학 중이었다. 그는 낮에는 고용 노동을 하고 밤에 수학하는 야간생이었다. 화숙에서의 미술교육은 철저히 고전에 의거하여 진행되었는데, 화법에서는 몰골을 기본으로 하면서 쌍구법으로 면과 입체를 보충적으로 살리도록 하였다. 대상에 대한 설명적 묘사는 피하고 집약과 강조, 생략의 수법을 장려하고 기운생동한 형상을 요구하였다. 5년간 화숙에서 공부하고 1940년 초부터 후속회미술전람회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 서울에서 세 차례에 걸친(1947년, 1948년, 1950년) 2인 미술전람회를 개최했는데, 노동계급을 주제로 한 다수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6.25전쟁(북한은 ‘조국해방전쟁’으로 기술) 시기 월북하여 조선미술가동맹에서 조직한 사업에 따라 전투부대들에 파견되어 직관선전(直觀宣傳(북한어) -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만든 속보, 벽보, 구호, 그림, 사진, 도표 따위를 가지고 하는 선전)과 미술창작을 진행하였다. 
전후 평양미술대학에서 1960년까지 교원으로 있으면서 조선화 《평로는 복구된다》(1955년, 200x150cm), 《보천보풍경》(1958년), 《벌목공》(1959년), 《류벌공》(1959년)과 《조선인민혁명군대원들속에서 애국주의교양을 하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1959년), 《홍기하전투》(1960년)를 창작하였다. 그중 《평로는 복구된다》, 《벌목공》, 《류벌공》등은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황영준은 1966년부터 평안남도 남포시에서 미술가동맹 위원장 사업을 하면서 주요 주제의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조선화 《대안전기공장을 현지에서 지도하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정영만과 합작, 1964년),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에 대하여 강의하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안상목, 로선주와 합작, 1968년), 《백석탄밀영에서 학습을 지도하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로선주, 안상목과 합작, 1968년), 《대안의 노동 계급을 찾으신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류재경과 합작, 1976년, 169x226cm), 《백두고원》(1961년), 《청봉숙영지》(1962년), 《청봉의 밀림》(1963년), 《밀림풍경》(1963년), 《구시물통》(1964년), 《금강산옥류동》(1965년), 《전적지풍경》(1965년), 《금강산》(1965년), 《만물상》(1965년), 《외금강》(1966년), 《춤》(1966년), 《근거지의 봄》(1969년), 《소백수》(1969년), 《결판을 내자》(윤형섭과 합작, 1971년, 100x137cm), 《양덕 은하리풍경》(1978년), 《포태산을 바라보며》(1978년), 《청봉으로 가는 길》(1979년), 《봄》(1980년), 《리명수의 봄》(1968년), 《포태리의 봄》(1987년) 등이다. 그리고 1988년에 홍성철과의 2인 미술전람회에서 《소백산》, 《북포태》, 《삼지연늪가에서》, 《삼지연의 봄》, 《포태산》, 《포태산의 봄》, 《금강의 가을》, 《만물상의 가을》등을 발표했다. 
황영준은 1950년대 중엽과 1960년대 초 북한이 혁명전적지로서 신성시하는 백두산지구를 여러 차례 답사하며 천여 점에 이르는 습작을 하였고, 국가미술전람회와 부분미술전람회,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개인 전람회에서 무려 백여 점에 이르는 혁명전적지 풍경들을 내놓았다. 
리재현에 따르면, 현실표현의 직관적 형식들을 창작가의 개성에 굴절시켜 독특한 형상방법을 창조하는 것은 미술창작에서 견지해야 할 중요한 원칙의 하나이며, 미술가가 사회와 민족에 기여하는 미술 작품을 창조하려면 주체적 사실주의 원칙에 기초하여 현실반영의 개성화를 실현하여야 한다. 미술가의 얼굴이 드러나는 개성적인 작품으로 자신의 독자적 화풍을 수립하는 경지에 올라선 미술가만이 창작가로서 고귀한 삶을 빛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황영준은 개성적인 화풍을 명백하게 수립한 소수의 미술가들 중 한 사람으로서 조선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개성적 화풍에서 주요한 특징은 독특한 선묘이다. 그에게 대상표현의 기본수단인 선묘는 전통적인 선묘 기법에 토대를 두고 있으나, 그와는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요 묘사 대상의 형태 처리를 선묘 위주로 하면서 짧은 선과 점으로 형상을 완결 짓는 점이다. 색채처리에서도 자신의 독특한 형상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창작적개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30대에 싹이 트고 40대에 대를 세우기 시작한 개성화가 끊임없는 자양분을 받아 50대에 비로소 자기의 면모를 드러내었다고 할 수 있다. 
창작에서 개성화를 실현하는 데서 얻은 교훈은 그것이 주관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민족전통에 뿌리를 두고 사실주의 원칙에 서서 꾸준하고 인내성 있는 탐구와 노력을 경주할 때 창작자의 개성은 빛을 보게 된다. 아직 나의 그림에는 창작적 개성이라는 아지(雅志/ 북한어 – 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마음)가 돋아나기 시작한데 불과하며 아지가 무성하고 꽃이 활짝 피어나려면 인민대중의 평가와 역사의 검증을 받아야 할 것이다.”
1966년 이후 1985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황영준은 1988년에는 공훈예술가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송화미술원 명예고문으로 있으면서 평생 작품 활동에 매진하였다.

위 내용은 리재현 저 『조선력대미술가편람』(1999, 문학예술종합출판사)의 ‘황영준’ 소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pp. 377-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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